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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nitted
REVERSE: 1999 | 코르부스 + 센티넬

◈ ◈ ◈


 

_코르부스와 센티넬의 첫 만남 날조입니다.

 

 

 

여행 가방의 무수한 많은 방들은 제각각의 인테리어가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그 공간을 좁다 평하기도, 또 어떤 이들은 넓고 충분하다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 방들은 "집"이기도 하다. 이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전등이 환하게 밝히고 있는 방 속에는 크고 작은 실루엣이 하나씩 의자에 앉아 있다. 큰 실루엣은 묵묵히 뜨개질을 하고 있고, 작은 실루엣은 옆에서 조용히 구경을 할 뿐이었다. 방에는 따뜻한 적막이 감돌았다.

"코르부스, 아이마! 내 이야기 좀 들어봐!"

꼬마 흡혈귀가 방에 불쑥 들어오며 두 사람에게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루비! 무사히 돌아왔군요. 어서 와요."
"버틴이 나를 처음으로 임무에 불렀잖아? 그런데 엄청 신기한 일이 많았어!"
"천천히 말해, 루부스카. 우리 둘 다 듣고 있어."
"하! 코르부스,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걸?! 여럿이서 나간 임무였는데, 세상에. 무슨 커다랗고 새카만 날개를 가진 키메라 같은 친구랑, 가고일이랑, 그리고 무려 제멜바이스까지 있었어!"
"어머, 제멜바이스요?"
"그래! 그런데 오랜만에 보니까 흡혈귀가 되어있더라?! 짱이지! 우리 '흡혈귀 가족'의 일원이 될 수도 있겠더라고!"
"흐, 흡혈귀요?"
"뭐? 누구에게 감염된 거야?"
"그건···바빠서 못 물어봤지만! 아무튼, 그건 나중에 또 만나서 대화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편지를 써도 되고. 이젠 같은 여행 가방 식구잖아?"
"그렇게 얼렁뚱땅 넘겨도 되는 부분인가요···."
"참, 그것보단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 그 가고일 친구도 바느질을 잘한대."

산탄총처럼 쉴새없는 루부스카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코르부스의 흥미를 돋은 건 그 문장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코르부스의 손이 잠시 멈춘 것을 눈치챈 루부스카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무려 패션 디자이너래! 파리에서 제일 잘 나가—나갈 예정이라고."
"패션 디자이너? 이름이 뭔데?"
"센티—아, 마리안! 마리안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어. 아무래도 전시 중에는 가게를 차리기 어려우니까, 당장 바깥에는 개업하지 못했대. 그치만 여행 가방 안에서 옷 수선이나 맞춤 제작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찾아오랬어!"
"정말요? 좋은 분이시네요. 코르부스, 한 번 만나보시는 건 어떤가요? 관심사가 겹쳐서 좋은 친우분이 될 수도 있겠어요."
"······."
"후후후후···. 사실 이 위대한 루부스카께서 그럴 줄 알고 약속을 잡아뒀지! 코르부스, 내일 오후 2시즈음 만나자고 했는데, 같이 나갈래? 조금, 아니 많~이 무섭게 생긴 친구도 같이 데려갈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 뒀거든! 네가 뜨개질을 잘한다는 걸 이야기하니까 마리안도 궁금해하더라고."
"적어도 나는 여행 가방에 온 이후로 이 곳의 아이들을 울린 적은 없어."
"그게 중요해?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갈게. 오후 2시라고?"

작게 한숨을 내쉰 코르부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여행 가방에 들어온 이후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도나우 여명호의 가족들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를 미쳤다. 이 새로운 만남 역시 그들에게 좋은 변화점이 될 것 같다는 작은 기대를 자아냈다. 코르부스는 다시 바늘을 쥐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서늘해지는 날씨를 대비해 아이마와 루부스카를 위해 스웨터를 뜨는 그였다.

◇​

"마리안, 여기야!"
"수선 떨지 마, 루부스카. 여행 가방 로비는 그리 넓지 않아서 소리 지르지 않아도 충분히 들린다고."
"안녕, 루부스카. 그리고 이 쪽이—"
"코르부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리안."

센티넬은 불쑥 내밀어진 손을 흔쾌히 맡잡았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상대의 행동에 코르부스는 되려 흠칫했다. 루부스카는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악수에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아, 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보다 총을 쓰시는 모양이군요."
"느껴졌나요? 코르부스 씨 역시 전장에 계셨던 모양인데, 우리는 이미 공통점이 제법 많은 모양이네요."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 나이···가?"
"26세입니다. 코르부스 씨는요?"
"34세입니다. 말은 편하게 해도 좋아요."
"후후, 처음 뵈었으니 천천히 놓죠. 코르부스 씨는 뜨개질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아이마와 루부스카가 입을 옷 정도는 뜰 수 있어요."
"그렇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옷 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에게 맞게 제작해서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거든요."
"···경험담인가요?"

불쑥 튀어나온 코르부스의 질문에 센티넬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 속에서 소중한 이를 잃는 것은 부지기수한 일이었고, 발화자와 응답자 둘 다 충분히 체감하고도 남은 사실이었기에. 코르부스는 무의식적으로 당장은 제게 없는 벨트의 형상을 주머니 속에서 손끝으로 좇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어쩌면 현재의 소중함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뜨개질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제게 있어서 패션 디자인은 오랜 꿈이기도 하고, 반란이자 독립에 가깝기도 해요."
"반란이자 독립, 이요?"

예상하지 못한 단어들의 나열에 코르부스가 센티넬의 말에 반문했다.

"제가 가고일이라는 이야기는 루부스카에게서 이미 들으셨겠죠."
"네."
"이 악마의 혈통이라는 집안의 족쇄에서 저는 늘 자유를 갈망했어요. 세계는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데, 계속해서 과거의 유산에 얽매인 집안 분위기를 어린 저는 제법 하찮게 여겼었죠. 그래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치기 어린 아이의 사고였어요. 하지만 평생 영향을 끼친 중요한 갈림길이기도 했죠."

센티넬은 로비의 창틀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단순한 뜨개질과 바느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온 자리에서 예상보다 많은 자신과의 공통점에 센티넬은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총, 군인, 어쩌면 탈영. 흉터, 그리고 바느질···.
마샤에게서 느꼈던 "운명의 장난"과는 또 다른 갈래의 인연이었다.

◇​

"나는 정식 군인은 아니였어요. 유격대라는 이름의, 오합지졸에 가까운 갈 곳 없는 이들의 모임에 가까웠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이들이 각자의···소중한 이를 잃은 경험이 있었고요."

코르부스는 뜸을 들이더니 창 밖으로 시선을 잠시 돌렸다. 이글리카 는 그 "소중한 이"를 잃은 경험이 없는 채로 그들과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는 코르부스 가 이 자리에 서 있다.

"치기 어린 아이의 사고라는 말은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에요. 당시의 저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에 이미 마음을 준 상태였어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내 생각보다도 너무나 연약한 것이더군요. 어렸던 나는 그렇게 뒤늦게 성장이라는 걸 했어요."
"인연이라는 건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무슨 말인지 조금은 이해가 가네요."
"그렇죠. 마리안, 당신이 어려운 이야기를 선뜻 꺼내주어서 털어놓게 됐네요. 다른 이들에게는···"

피로스 외의 인물에게는 이렇게까지 털어놓은 적이 없었는데. 아이마에게조차 자신의 속내를 깊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 아이에게 자신의 짐을 지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건조하지만 따스한 가고일의 목소리가 코르부스의 생각을 덮었다.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공감대라는 게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에요. 이야기가 너무 깊어졌네요. 화제 전환을 해도 괜찮을까요? 마리안은 패션 디자인에 능통하니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멋진 뜨개 도안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물론이죠. 뜨개질에 능통하지는 않지만, 지식은 알고 있으니 도안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마침 겨울이 되어가니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는데···"

◇​

두 사람은 다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어두운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에 대해.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로비의 의자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마리안이 내민 도안을 하나 고른 후, 주머니에서 실과 대바늘을 꺼낸 코르부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안."
"네."
"당신은 가고일이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이 종종 있지 않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악마의 후손이니 두려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마음가짐이 조금 부럽네요. 나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임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울리곤 하니까요. 물론 이 곳에 온 이후로는 아무도 울리지 않았지만요."
"그건 이 곳의 아이들이 조금 특이해서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타임키퍼에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 그런 이유인 걸까요. 아이마가 내게 웃는 연습을 하라고 해서 노력한 게 결실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코르부스, 당신이 항상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 곳의 아이들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흉터와 큰 키는 단순히 겉모습이지 않나요. 말했듯이 이 곳의 아이들은 평범하지 않으니까, 당신의 내면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라요. 실제로 저는 이 곳에서 제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아이들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사려 깊은 가고일의 위로에 코르부스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실제로도 자신은 노력하고 있었고, 어쩌면 정말로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기대가 타인에게 인정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기에.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군요, 마리안. 고마워요. 조금 안심이 되네요."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이에요. 그보다 정말로 뜨개질 속도가 빠르네요."
"뜨개질을 하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그 여파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디자인을 할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든답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정말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타임키퍼의 여행 가방이 아니였으면 만나지도 못했을 인연이라는 점이 재밌네요. 당신과 전장에서 만났다면···아니,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그랬더라도 우리는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 같아요."
"동감이에요. 마샤와는 적대했음에도 이제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둘의 대화를 갑작스레 끊은 건 여행 가방에 들어선 버틴이었다. 한결같은 모자와 연미복을 입은 소녀가 로비에 들어서곤 두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어, 센티넬. 그리고 코르부스?"
"타임키퍼. 무슨 일이야?"
"마침 찾고 있었어. 루부스카는 이미 왔고, 이제 당신만 오면 돼."

새로운 임무라는 뜻이었다. 센티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버틴을 따라 나섰다. 여행 가방의 입구에서 잠시 멈춘 센티넬이 코르부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 코르부스. 마샤에게 보낼 편지에 당신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 역시 아이마와 루부스카에게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어요."
"같은 생각이라 기쁘네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루부스카를 통해 다음 만남을 또 정해도 괜찮을까요?"
"역시 물론이죠."
"고마워요. 다음에는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해요, 코르부스."
"그래요. 무사히 다녀오길."

두 사람을 보낸 코르부스는 다시 뜨개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적막 속에서 코르부스의 손길에 마리안의 디자인이 차차 실체화되었다.

© 2026 hako | updated 2026.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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