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gabalin, Lyrica
REVERSE: 1999 OC × Medicine Pocket yume | 1st Aid Box
◈ ◈ ◈
“메디슨 포켓.”
“나 뭐 잘못했냐?”
색채 상자가 메디슨 포켓을 메디슨 포켓이라고 부르는 일은 정말 드물었기에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항상 리리카, 또는 메디슨 포켓을 자극하고 싶을 때는 사랑스러운 강아지, 귀여운 레몬. 메디슨 포켓을 아는 이들이 들으면 기겁할 단어들의 나열로 그를 호명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약물들의 샘플에 구멍이 날 정도로 노려보던 그가 보안경을 벗어던지며 관찰 대상을 색채 상자로 변경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인간들이 보통 풀네임을 부르면 혼내기 위해서거든. 가령 부모가 그런다던가.”
“그래?”
색채 상자가 고개를 갸웃, 하고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새로운 지식이 또 하나 늘었네, 나는 그런 의도로 누군가를 불러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그냥 불러봤어. 내가 너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있던가?”
“아니? 넌 초면부터 나한테 강아지니 뭐니 했으니까. ‘메디슨 포켓’이라고 부른 것은 그 때뿐이었거든.”
“기억력도 좋네.”
“네가 이상한 거야.”
“그래, ■■■.”
메디슨 포켓이 흠칫했다.
잊었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들은 것도 10년도 더 된 일이다. 메디슨 포켓이 색채 상자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뭐가.”
“그렇게 부르지 마.”
“약 주머니, 라는 이름보다는 더 제대로 된 이름 같은데.”
“싫다고."
“그렇게 반응하는 건 또 처음이네. 재밌다.”
“하.”
메디슨 포켓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욱했다. 애초에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대로 입사했겠지. 가족을, 혈육을 버리고 나와 스스로를 정의한 메디슨 포켓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묻어둔 쓰레기이자 유산에 불과했다. 색채 상자는 그것을 파헤쳐서 굳이 메디슨 포켓의 면전에 들이밀은 것이었고.
“내가 왜 그 이름을 쓰지 않는지는 생각 안 해봤냐?”
“글쎄, 적어도 나는 내 이름을 쓰지 않는 이유가 있지. 이 세계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
“그래, 그딴 거. 나는 스스로를 메디슨 포켓이라고 정했고, 혈연이라 한들 한낱 타인이 나를 재단하는 게 싫어서 지은 거야. 알아들어?”
“글쎄.”
“명료하게 설명했잖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고작 이름 하나로 재단할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그릇이 거기까지였겠지.”
“그건······맞는 말이긴 한데, 논점은 그게 아니라고. 나는 그 이름을 버린지 오래야. 네 앞에 있는 건 메디슨 포켓이지, ■■■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고.”
예상 외로 정곡을 찌른 색채 상자의 말에 메디슨 포켓의 말문이 아주 잠시 막혔다. 라플라스의 괴짜들은 유별나기로 유명하지만, 여전히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지식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메디슨 포켓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곤 했고, 그는 얼마 지나자 정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수고스럽고, 에너지 낭비라는 판단 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이 머저리들은 ‘폭풍우’를 넘어선 30년 후에도 여전히 왈가왈부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제 앞에서 이 주제를 꺼낸 이는 오랜만이었기에, 메디슨 포켓은 익숙하지만, 잊고 있었던 생각에 금세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를 방해한 것은 마찬가지로 색채 상자였다.
“그리고 네 앞에 있는 건 색채 상자지.”
“어쩌라고.”
“내가 사실은 색채 상자가 아니고, 색채 상자라는 인격을 연기하는 또다른 무언가라면 나는 정말 색채 상자일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내 앞의 네가 사실은 가짜다, 같은 말을 하려는 거야?”
“비슷해.”
“나는 내 눈에 보이는 사실 그대로를 판단할 뿐이지. 네가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아는데? 나한테는 독심술 같은 재주 없거든? 평범한 사람이니까!”
“재미없네. 단순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러는 너는 그렇게 대단해서 정신머리가 그 꼬라지인 거냐?”
“아무래도 그렇지.”
“웃기지도 않은 소리.”
◇
“메디슨 포켓, 메디슨 포켓.”
“뭐.”
“너무 길어.”
“색채 상자는 짧고?”
“그래서 채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너는 그런 거 없어?”
“네 마음대로 불러. 성별 문제가 아니라 길어서 귀찮다는 녀석은 처음 보네.”
희한한 녀석. 뭐, 비슷한 무성의 몸이니까 이 녀석에게 그런 표면적인 문제는 논할 필요도 없겠지. 애초에 나와 다르게 내장이나 배출구는 딱히 없는 모양이지만. 유일하게 그럴듯하게 구현한 ‘입’을 제한다면 말이지. 메디슨 포켓은 눈 앞에 쌓인 관찰 일지와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색채 상자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해부야 진작에 했지만, ‘얼굴’에 해당되는 부분은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 그러니까 메디슨 포켓은 색채 상자를 반으로 잘라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미심쩍었지만, 색채 상자의 말대로 그에게 아무런 처치를 하지 않고도 해부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비윤리적인가.
메디슨 포켓은 자가 실험에 능숙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도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고약한 성미 치고는 의외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느냐면—
“바이옥스Vioxx 어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별명, 애칭, 뭐 그런 거. 괜찮은데?”
“로페콕시브의 상용화명이잖아.”
“별로라면 리리카Lyrica라는 옵션도 있어.”
색채 상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씩 웃으며 소파에서 내려와 메디슨 포켓에게 다가갔다. 예고 없이 어깨와 뺨에 맞닿은 서늘한 감촉에 메디슨 포켓이 흠칫하며 제 뒤의 색채 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건 또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이름이냐고, 그건. 설명을 해보라는 눈빛이다.
“이 세계에 관련해서 조금 읽어보고 있었어. 나중에—그러니까, 너희가 말하는 ‘폭풍우’를 극복한 이후의 시점에 말이지. 보통의 사람들이 로페콕시브나 프레가발린을 매상 말하기는 어렵잖아? 메디슨 포켓이 너무 길듯이 말이야.”
친숙한 약물들의 나열이다. 특별히 선호하는 약물이냐 하면 아니지만, 선택지에 있다면 고민 없이 고를 진통제들. 메디슨 포켓이 제 ‘호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종종 내놓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메디슨 포켓의 금빛 눈동자가 색채 상자를 조용히 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로페콕시브는 2004년도에 시장에서 사라지게 돼. 그럼 바이옥스는 별로인 것 같네. 그럼 리리카가 좋으려나?”
“그게 프레가발린의 상용화명이야?”
“그래. 이건 오히려 2004년에 정식적으로 상용화되네.”
메디슨 포켓은 지금 어쩌면 미래를 스포일러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상관 없나? 그런데 보통 원하지 않은 스포일러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색채 상자는 메디슨 포켓 분노시키기 자격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 지금 스포일러 하냐?”
“그렇게 되나?”
“이건 이거대로 기분 더럽네. 저리 비켜.”
메디슨 포켓이 신경질내며 은근슬쩍 어깨에 기댄 색채 상자를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색채 상자는 스스로 내린 결론대로 제 앞의 이를 호명했다.
“그래, 리리카.”
“아주 매사가 제멋대로지?”
“너도 그렇잖아.”
“내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너는 한 술 더 뜨고도 남았다는 이야기야.”
“그래, 그래. 그래도 판매 중지된 약물에 비하면 이 편이 낫긴 하지?”
“네 마음대로 해.”
메디슨 포켓은 투덜대면서도 여분의 종이에 무어라 휘갈겼다. 로페콕시브 상용화 중지, 프레가발린은 ‘리리카’라는 이름으로 상용화. 그리고 나를 ‘리리카’라고 부르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미래’를 읽거나 발설할 수 있으면 재단에게 기껏 얻은 실험체를 빼앗기는 거 아닌가? 적당히 설득해서 입을 막는 편이 내게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과 함께 메디슨 포켓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볼펜으로 눈썹을 긁었다. 그보다 ‘미래’의 의약품 관련이라면 궁금하기는 하다. 적당히 쓸데없는 것들을 소거할 수 있다면 연구 효율을 높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메디슨 포켓의 눈썹이 들썩이더니 제법 담담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로페콕시브가 중단된 이유는 그거지? 심혈관 문제—특히 심근경색이랑 뇌졸증 확률을 높이니까.”
“오, 맞아. 알고 있었나 보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언젠간 그럴 것 같았어. 당장의 최적해 중 하나니까 상용화된 거지, 부작용을 타파할 수 있거나 차선책이 나오면 어떤 약물이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대체제는, 세레콕시브?”
“알고 있네. 굳이 세레콕시브를 쓸 필요가 없다면 선택지는 좀 더 넓어지지.”
“NSAID 계열이 그렇지, 뭐. 그런데···.”
“그런데?”
메디슨 포켓이 볼펜대를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도 스포일러지만, 그의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존재했기에.
“결국 누군가가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미래에 도달한 거잖아?”
“그렇겠지?”
“그래서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의미를 모르겠어.”
“그 사실을 안다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 미래는 오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계시가 갑자기 떨어지지는 않아.”
“사서들에게 들어본 바 있어. 운명은 개척하는 거랬나. 그런데 그거, 너희 생각보다도 정말 의미 없는 거거든.”
“무슨 소리야?”
“물론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 하지만 그 행동을 행하는 주체에게는 인격이나 특징 같은 게 제각각 깃들어 있잖아?”
“···그렇겠지. 종종 생각 없이 행동하는 이들도 있지만.”
메디슨 포켓이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색채 상자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그러니까 운명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은 의미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그런 말은 수없이 많이 들어봤다.
이를테면 제 부모의 ‘성별 교정’에게서 도망친 메디슨 포켓 자신이라던가. 메디슨 포켓은 그것이 나름 스스로 개척한 운명이자 의지라고 여기고 있다. ‘폭풍우’가 세계를 휩쓰는 현실에서 어린아이 홀로 도망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고,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메디슨 포켓은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말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애초부터 생식기관이 없을 운명이었고, 교정에서 도피한 것도 운명이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만 동시에 색채 상자의 말에도 일부 일리는 있었다. 메디슨 포켓은 이런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택하기 위해 발버둥쳐서 이끈 결과가 현재였다. 그런데 그 개척이 의미가 없다고? 보통의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으면 메디슨 포켓은 평소처럼 콧방귀를 뀌며 꺼지라고 했을 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색채 상자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다른 감각이 들었다. 자신이 ‘고차원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 기묘한 초자연자는, 그렇게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메디슨 포켓에게 불확실성을 심기 시작했다.
“그럼 이것만 묻지. 내가 지금 하는 실험들은 전부 미래에는 이미 보편화된 지식이 되어 있을 테니 의미가 없어?”
“그렇다고 한 적 없어. 당연히 누군가가 행동했기에 그 미래가 있는 거니까.”
“그럼 됐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발설하지 마.”
“어째서?”
“네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줄까? 재미없어.”
“아하.”
색채 상자는 드물게도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색채 상자가 납득한 이유도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는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서 헤쳐나가는 이들이 흥미로웠기에 이 세계에 직접 들어온 것이었다. 즉, 그는 이들과 같은 페이지에서 살아가는 감각을 체험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다음 페이지를 미리 넘겨가며 단순히 감상하려 했다면 등장인물이 될 필요도 없었다. 색채 상자는 그렇게 앉은 자세로 메디슨 포켓 옆의 허공에서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 둥둥 떠있었다. 메디슨 포켓이 종이에 악필로 끼적인 것을 색채 상자가 낭랑하게 소리내어 읽었다.
“자유자재로 비행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
“멋대로 읽지 마.”
“그럼 숨어서 작성해.”
“관찰 일지인데 어떻게 그러냐고!”
“그럼 내가 읽게 둬.”
“짜증나는 새끼.”
“리리카.”
너는 미래에도 한결같은 모습일까? 바이옥스처럼 정지된 형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나아가는 존재. 그 편이 네게도 더 어울리지. 이 세계에는 너 같은 이들이 많고, 그걸 곁에서 관찰하는 것도 길고 긴 삶의 작은 유흥 중 하나가 되리라.
◇
“내 진짜 이름은 안 궁금해?”
“네가 먼저 말하는 거 아니면 관심 없어. 잘못 말했다간 세계가 멸망한다며?”
“그래. 너답다, 리리카.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여기서 말해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네가 묻는다면 알려줄 의향은 있지.”
메디슨 포켓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보안경이 그의 금빛 눈동자를 도로 가렸고, 그는 다시금 실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실험도 결국 의미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로페콕시브는 결국 시중에서 사장될 것이고, 어린 나이에 위대한 업적을 세운 메디슨 포켓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그렇게 현존하는 대부분의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모든 것이 무의미한가?
“원래 모든 것은 관찰하는 이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야, 리리카. 그러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여전히 모르겠다는 것이 메디슨 포켓의 결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