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requited
REVERSE: 1999 드림 커미션 | 이고르 × 차이카
◈ ◈ ◈
_커미션입니다.
◇
펜이 꺾인 작가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그는 그럼에도 처절한 전장에서 살아남았고, 묵묵히 자신만의 글을 계속해서 써 내렸다.
그의 펜은 왜 꺾였는가?
작가는 펜대를 사랑스러우면서도 증오스러운 제 아버지의 손에 내밀었고,
“비라.”
삶의 공허를 채운 전우, 형제자매, 전쟁, 그리고······
아버지.
그래, 모든 것은 ‘아버지’인 이 남자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
“생일 축하한다, 비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비라.”
“네, 아버지.”
“로페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중을 모르겠는 질문이다.
그날은 마침 차이카의 생일인 8월 8일이었고, 자신의 집무실로 차이카를 조용히 불러낸 이고르는 미리 준비해 둔 고급 만년필과 노트를 그에게 선물한 차였다. 늘 그랬듯, 생일 축하한다, 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직후 날아든 질문은 예년과 다른 패턴이었다. 저보다 어린 자매에 대한 뜬금없는···질문.
“로페라는 좋은 동생이자 전우죠.”
“그 애가 가족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지금의 형제자매와 함께니까요.”
“그래, 알았다. 나가 봐라.”
그 질문의 의미를 진작에 알아차려야 했는데.
차이카의 그 답변은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 로페라는 몰디르에게 그렇듯 차이카에게 있어서도 사랑스러운 동생이었고, 은연중에 로페라를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자신의 혈연을 버린다는 선택을 진심으로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며 ‘저주’를 제 발로 피했다는 점이. 차이카는 문득 로페라가 입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를 떠올렸다. 로페라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활기찬 아이였다. 비쩍 말랐다는 점을 제한다면 말이다. 그런 로페라를 염려한 차이카는 이고르가 자신에게 했던 대로 감자를 준비했는데, 즈메이의 혈통인 차이카와 다르게 통상적인 마도학자···에 가까운 로페라에게는 버거운 양이었다.
“로페라, 감자 먹어.”
“···이걸 다? 껍질은 안 벗겨? 조리는?”
로페라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조리도 되지 않은 감자 한 상자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차이카는 고개를 기울였고, 로페라는 순간 움찔했다. 아니, 마음은 고맙지만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로페라의 의문을 저 멀리 날린 것은 그런 감자를 하나 집어서 으적으적 씹기 시작한 차이카였다. 상황을 파악한 로페라가 멍하니 서 있다가 차이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독은 없어. 싹이 있는지 전부 확인했으니까.”
“음···그, 차이카 언니? 보통은 익혀서 먹지 않아?”
“아.”
그렇게 감자를 한 솥 가득 삶아서 로페라에게 먹이던 차이카를 뒤늦게 발견한 몰디르가 두 사람을 혼낸 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였다. 그건 로페라나 차이카 나름의 친해지기 위한 행위였고, 더 나이가 많은 형제가 제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고르 장군에게 복종해라, 그에게 충성하도록 하라.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과 달리 제노에서 차이카는 그렇게 ‘삶의 방법’을 차차 배워나갔다. 이고르가 직접적으로 가르친 것도 많았지만, 일전처럼 몰디르가 지도하듯이 차이카는 간접적으로도 이고르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가르침은 수없이 많았지만, 차이카가 특히나 기억하는 이고르의 말들은 이러했다. 살육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네 본성만을 좇아서는 안 된다. 사람과 함께하는 법을 가르쳐 주마. 너는 오늘부터 이 아이들과 함께 살며 한 가족, 형제자매처럼 지낼 것이다.
그것은 이고르가 차이카를 입양하고 안겨준 약속이자 명령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한 아이들과 차이카는 이고르의 ‘자녀들’이 으레 그렇듯이 하나의 군인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이고르의 약속이자 명령에는 여러 가지가 추가되었는데, 차이카는 개중 한 문장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그리고 배신자는 사살해라. 망설이지 말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고르 장군은?
이고르라는 남자는 제노를 배신했다. 로페라의 마음을 배신했다.
상파울루의 반란 후 텅 빈 방 속에 차이카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핏발이 잔뜩 선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배웠던대로 저격소총을 조준했다.
배신자는 가차 없이 사살하라셨죠. 하지만 아버지, 그들 역시 ‘우리’였잖아요. 그들도 지금의 저와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죽어갔습니다. 그런 ‘우리’를 배신한 아버지는요? 아버지는요? 아버지는요? 나의 사랑스럽고 증오스러운 아버지는요? 아버지 역시 사살해야 하나요? 저격수인 제 손으로 또 하나의 우리를 죽여야 하는 건가요?
그릇된 감정이 요동치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차이카의 손에 들려 있던 저격소총은 이내 바닥에 던져졌다. 대신 그 손에는 빈 탄창의 권총이 쥐어졌다. 이어서 텅 빈 탄창의 권총이 연신 딸깍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잘못된 속죄다.
로페라를 향한 속죄다. ‘우리’를 향한 속죄다.
◇
나에게 드리운 어머니의 운명이자 그림자는 어디까지 가는가. 재건의 손과 함께하는 우리의 앞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아버지는 ‘우리’를 구원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적의 손을 일시적으로 잡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한들, 그가 동시에 우리를 배신한 것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핏발이 선 눈으로 우리의 손에 우리의 피를 묻히며 그들을 영영 묻어야 했던 것에 대해 이고르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그것이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 의문에 어째서인지 차이카의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역시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 이 무거운 마음은 차이카 혼자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이카는 이고르를 증오하면서도 애틋하게 여기는 이 마음을 그대로 이고르에게 쏟아내고 싶었다. 당신이 그 대상이자 원인이잖아. 당신은 나의 아버지잖아. 그렇다면 이 역시 자식을 위한 의무 아닌가? 받아들여! 나를 이해하게 해 달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차이카는 당장 이고르를 향해 달려갈 심산이었다. 그의 크고 단단한 몸에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한다 한들, 차이카는 그에게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해서라도 항의하고 싶었다. 당신의 향한 마음이 더 이상 무거워지지 않게 해 달라고,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크루토프는 그 해답을 향한 길을 방해했다.
나를 선택해라. 그건 크루토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크루토프는 차이카가 선택한 적도, 배신한 적도 없는 상관이었다. ‘비라 이고리브나 벨로바’를 바라보는 이고르와 달리, 크루토프는 차이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폭력과 고문을 자행하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그 너머의 무언가를 향해 어긋나 있었다. 당신은 아버지가 될 수 없어, 크루토프. 당신은 ‘아버지’가 될 수 없어. 그 신뢰와, 시간과, ‘차이카’를 바라봐주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 그 사실을 완전히 깨달은 차이카가 제 안의 감정을 매듭지었다. 한 단어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이 끈적거리는 감정은 결코 크루토프의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어떤 대가를 불러올지언정.
“이고르 장군을 선택한 것은 오로지 나의 마음이야, 크루토프. 당신은 절대 그가 될 수 없어.”
그 마음의 대가는 왼쪽 눈알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차이카는 그 빈자리에서 어떠한 해방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저주, 어머니의 그림자, 어머니의 운명.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과 마음은 온전히 본인의 것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 준 것은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그런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 역시 차이카 자신의 마음이다. 시작이 어머니의 그림자였을지언정, 지금의 차이카가 선택한 것은 역시 그라고. 기묘한 후련함과 함께 차이카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익숙한 형제들, 익숙한 아버지. 사랑스럽고 증오스러운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듯 차이카 역시 손끝에 그리던 이고르가 다시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망령으로 인해서가 아닌, 오로지 차이카의 선택 속에 그가 있었다.
◇
저는 여전히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이고르 장군, 아버지. 그건 로페라도 마찬가지겠죠. 당신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은 몰디르 언니 역시 당신을 향한 존경과 충성만으로는 따를 수 없었던 걸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감정은 당연한 겁니다.
“생일 축하한다, 비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증오, 애정, 용서. 그것은 여전히 너무나도 무거운 감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