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Go Round
REVERSE: 1999 드림 커미션 | 플로렌스 해링턴 × 메디슨 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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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커미션입니다.
◇
3주 정도 후.
기동성에 문제가 될 수준의 골절상은 제법 회복되었다. 원체 외출을 즐기는 편인 플로렌스는 좀이 쑤셨고, 근 3주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더라도 잠시 외출하는 정도가 전부였기에 의사의 허락은 그에게 있어서 가뭄 속의 단비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허락을 내린 의사는 메디슨 포켓이었다.
◇
“이제 혼자서도 다닐 수 있겠네. 2주 정도만 더 지나면 목발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걸? 젊으니까 회복력이 좋네.”
“너는 나랑 동갑이잖아, 메디슨 포켓.”
“나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야. 여기서 10살 정도만 더 먹었어도 회복력이 지금 같진 않았을 거라고.”
“그건······그렇겠지. 의사는 너지, 내가 아니니까.”
“흥. 당연한 소리를.”
메디슨 포켓은 그렇게 톡 쏘아붙였지만, 굳이 더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건 그가 지키는 일종의 예의였다. 자신에게 쓸데없이 을러대는 환자라면 지지 않고 성질을 부렸겠지만, 플로렌스는 그런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메디슨 포켓은 빠르게 진찰 차트에 소견을 적어내렸다. 로렌, 플로렌스 해링턴. 빠른 회복 경과를 보임. 외출 신청 가능.
그런 메디슨 포켓을 플로렌스가 곁눈질하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로렌이라고 써도 상관 없는데.”
“이건 공식 서류야.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거면 나도 규칙이라는 걸 지켜. 나라고 뭐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귀찮다고.”
“그건···안타까운 일이네.”
“딱히 별로.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이야?”
“나를 로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거든.”
정적.
그건 나름대로 메디슨 포켓이 약간이라도 아차, 싶었다는 의미였다. 클립보드의 위에서 사각대던 볼펜이 멈추었고, 메디슨 포켓의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데룩, 굴렀다. 맞다, 이 녀석은 가족이 전부 ‘폭풍우’에 쓸려갔댔지. 메디슨 포켓이 고개를 위로 쭉 올리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젠장, 그 깡통머리 자식. 총책임자면 다야? 이런 위로나 감성적인 의사짓은 나랑 하등 맞지 않는다고.
그래, 로렌. 됐어? 하나라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위안이 될 것 같아?
아니다. 이게 틀렸다는 건 메디슨 포켓도 아는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의 눈동자가 다시 굴렀고, 고개는 도로 정방향으로 돌아왔다.
“전부 없어졌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을 필요는 없잖아.”
애써서 짜낸 그 말조차 불퉁하게 튀어나갔다. 쯧. 그게 메디슨 포켓이라는 사람의 한계겠지. 다만, 볼펜으로 어정쩡하게 눈썹을 긁는 그를 바라보는 플로렌스의 표정은 예상 외로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몇 안 되는 메디슨 포켓의 방문을 통해 플로렌스는 그게 메디슨 포켓 나름의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끊임없는 학습을 통한 인내심 역시 한 몫을 했다. 첫 인상은 돈벌레에 개껌 씹는 이상한 의사. 두 번째 인상은 사실 그는 진짜 개보다도 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세 번째는—
“나랑 산책 갈래, 메디슨 포켓?”
“안 그래도 좀이 쑤셨는데, 환자 케어라는 명분까지 붙으면 더 좋지. 가자.”
메디슨 포켓이 그렇게 클립보드를 옆의 탁자에 팽개치더니 냅다 병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플로렌스가 아직 환자라는 점을 깨달은 그가 다시 병실로 돌아오기까지 정확히 30초가 걸렸다. 정확히는 그가 누군가의 손에 붙들린 채로 병실의 문이 열렸다.
“환자! 환자 산책하러 나가려던 거야!”
“의사가 환자를 까먹는 게 말이 돼, 메디슨 포켓?”
“나 바쁘다고! 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이거 놓으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아, 플로렌스?”
“어, 어. 메스머 주니어?”
“플로렌스. 이 녀석 말로는 네 산책 보조할 거랬는데, 진짜야? 진짜면 왜 널 두고 냅다 달려나간 건데?”
무미건조하면서도 신랄한 목소리의 주인이 메디슨 포켓의 실험복 후드를 꽉 붙잡은 채로 병실에 입장했다. 그래, 메스머 주니어다. 자살 소동으로 인해 그와의 상담 및 왕래가 있었기에 익숙한 이였지만, 현재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목발을 짚고 침대에서 막 내려온 플로렌스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씩씩대며 겨우 메스머 주니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메디슨 포켓이 플로렌스의 뒤에 숨었다.
“저리 꺼져! 나는 환자, 그러니까 로렌의 산책을 도와주려던 중이라고! 네가 방해한 거라니까!”
“거짓말 하지 마, 메디슨 포켓. 플로렌스도 지금 상황에 당황한 것 같은데.”
“아···하하. 메디슨 포켓이 나와 산책하기로 한 건 사실이야. 워낙에 산책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따라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렇게 받아줄 필요 없어, 플로렌스. 메디슨 포켓, 환자를 방패로 쓰는 건 졸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알 바야? 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나가, 내 ‘환자 케어’에 더 토 달지 말고!”
“그, 그만 싸워.”
“쟤가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됐다고! 나가!”
“네에, 네에.”
메스머 주니어가 심드렁하게 답하더니 병실의 문을 탁 닫고 떠났다. 정적을 되찾은 병실의 첫 소음은 메디슨 포켓이 내쉰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가 병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나서며 물었다.
“자, 진짜 가자. 부축 필요해?”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 힘들면 말할게.”
“그래, 그럼.”
◇
병동 바깥의 공기를 제대로 맡은 지 딱 한 달 째, 플로렌스는 나름대로의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싱그러운 풀내음과 적당히 시원하고 습한 공기는 병실 안의 공기와 완전히 달랐다. 잔디 위에서 네 발로 기어다니던 메디슨 포켓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메스머 주니어도 네 담당이야?”
“담당···이랄까, 내 생각에는 루시 씨의 배려인 것 같아. 메스머 주니어도 엄청 바쁘다고 들었거든.”
“그렇겠지. 그 깡통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친구놀이에 그렇게나 열심인 건지 모르겠네.”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이렇게 또래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거든. 물론 라플라스는 남녀노소 가리지는 않지만···.”
“당연히 안 가리지! 가렸으면 애초에 그 깡통이 책임자 자리에 있었겠어?”
메디슨 포켓이 황당함에 뒤집힌 목소리로 내뱉곤 자신의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건 평범한 테니스공이었다. 메디슨 포켓이 그것을 플로렌스에게 내밀다 멈칫했다.
“맞다. 너 지금 목발 짚고 있지?”
“?”
“가만 있어봐, 저쪽 벤치까지 걸을 수 있어?”
“어?”
“빨리. 아니, 무리해서는 말고 적당히 빨리. ‘어’라며!”
“어?? 아니, 엥???”
플로렌스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로 메디슨 포켓에게 등 떠밀려 벤치 위에 안착했다. 아직 지칠 정도로 산책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휴식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플로렌스가 목발을 내려놓자마자 테니스공이 손에 쥐어졌다. 손에 쥐어진 공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플로렌스에게 메디슨 포켓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뭐 해? 던져.”
“응?”
“던지라고! 쥐고 관찰하는 거야, 뭐야?”
툭.
맥없이 던져진 테니스공의 궤적을 눈으로 쫓던 메디슨 포켓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너 던진다는 게 뭔지 몰라? 살면서 이렇게까지 공을 못 던지는 사람은 처음 보네! 메디슨 포켓은 더 이상 플로렌스가 환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않은 듯이 왁왁대며 공을 도로 주워서 플로렌스의 손에 꾸역꾸역 쥐어주었다.
“제대로 던져! 아예 멀리멀리 던져도 된다고.”
“아, 알았어.”
테니스공이 휙 던져지자마자 옆에 서 있던 메디슨 포켓이 총알같이 달려나갔다. 플로렌스는 그 잔상을 눈으로 겨우 좇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 형체는 이미 저 멀리까지 달려나간 상태였다. 무어라 더 물을 타이밍도 놓친지 1분 37초만에 메디슨 포켓이 공을 입에 물고 도로 나타났다.
“자!”
“또?”
“그래! 미적거리지 말고!”
메스머 주니어가 말한 게 이건가? 산책 보조보다는 사심을 채우려는 목적이구나. 나야 상관없지만···그보다 처음에는 개껌을 씹더니, 이번에는 캐치볼 놀이?
아무래도 이 ‘새 친구’는 아무래도 ‘사람’보다는 ‘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플로렌스의 뇌리에 꽂혔다. 어쩐지 러스티가 생각나기도 하네. 물론 메디슨 포켓은···러스티보다도 더 개···?
“또 던져!”
실례에 가깝다는 생각에 미치기 직전, 메디슨 포켓이 또다시 공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플로렌스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든 말든, 현재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캐치볼 놀이였다. 그러니까 환자 케어는 뒷전이라 해도 좋을 상태였다. 플로렌스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공을 던지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개보다도 더 개 같을 수가 있나? 러스티는 얌전한 편이었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메디슨 포켓이 구는 모양새는 꼭···목줄 풀린 비글 같았다.
비글?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색도 비슷하구나. 그래도 물지 않으니 상관 없으려나.
“잠깐.”
그러고 보니 부서의 동료가 푸념했던 일이 떠올랐다. 바이오 부서에서 협력 요청을 보내거나 할 때마다 서류에 종종 잇자국이 난 채로 온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메디슨 포켓은 바이오 부서장이지. 퍼즐이 기묘하게 딱딱 맞추어진 플로렌스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아직 목발을 짚어야 하는 환자가 바로 일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물기까지 하는 거야? 러스티도 안 그랬는데? 그래도 서류라면 상관 없으려나. 그래도 보통 사람은 그러지 않잖아?
그러니까 메디슨 포켓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부터 시작해야 하는 문제다.
그렇게 플로렌스가 생각에 잠겨 공을 대여섯 번 던진 후에야 메디슨 포켓은 어느 정도 지친 기색을 내비치며 숨가쁘게 돌아왔다. 공을 쥔 채로 그는 플로렌스의 옆에 앉아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엄청 익숙해 보이네.”
“운동 몰라, 운동? 나한테는 이게 하루 일과야.”
“보통 개들이나 할 법한 운동이잖아.”
“문제가 돼?”
“아니, 전혀. 그냥 신기해서.”
“개 키워본 적 없어?”
“있어. 러스티라고···버니즈 마운틴 종이었어.”
“그래? 까다로웠겠네.”
“그다지. 나는 강아지를 좋아하거든.”
“아깐 얼타길래 아닌 줄.”
“그건 예상 못해서 그랬던 거고. 다른 때도 누가 던져줘?”
“아니. 전용 야외 운동장에 공을 던져주는 기계가 있어. 오늘은 이렇게 진료 돌아야 하니까 틈타서 도망나온 거지. 덕분에 살았어.”
“난 딱히 한 게 없는 걸. 그래도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
메디슨 포켓이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언행은 분명 불친절했지만, 그가 빈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는 플로렌스는 겸언을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이제 그만 갈까?”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플로렌스는 아차, 했다. 기껏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나왔댔지. 이건 어리광에 가깝지 않나. 괜히 신경쓰이게 만들지 마, 플로렌스 해링턴. 이미 처음부터 민폐를 끼쳤잖아. 다만 메디슨 포켓은 전혀 개의치 않은 톤으로 툭 내뱉었다.
“그러든지.”
“바,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그 정도 시간은 있어. 깡통이 그렇게 사람을 쥐 잡듯 하지는 않는다고. 어항 머리라면 모를까.”
“어항···그, 암호해독 팀장 울리히 씨?”
“그래, 그 어항. 설마 모르진 않겠지.”
“엄청난 워커홀릭이라고 듣기는 했어. 우리 부서까지 이야기가 돌 정도로···.”
“라플라스 종특이지. 의식 각성자라 더 그런 거겠지만, 무슨 상관이야 그게. 그럼 공 한 번만 더 던져봐.”
“······.”
“빨리. 나 바쁜 몸이라니까?”
“그냥 들어가도 돼···.”
“아니, 던지라고!”
“아, 알았어.”
플로렌스는 그렇게 하는 수 없이 공을 네 번 정도 더 던지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병동으로 돌아오자마자 메디슨 포켓은 예의 어항 머리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로 병동 밖으로 끌려 나갔고, 플로렌스는 적막 속의 병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무익한 하루였나? 전혀 아니다.
쓸쓸한가? 잘 모르겠다.
힘든가?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작정 가족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플로렌스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플로렌스는 근 몇 주만에 처음으로 막연한 미래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목발 없이 다닐 수 있게 된다면 메디슨 포켓이 말한 그 운동장에서 산책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플로렌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라플라스에 입사했음에도, 정작 라플라스의 주변을 살필 새도 없이 부모님에 관한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그건 플로렌스가 앞으로 알아갈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당장은 괜찮지 않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