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feret
REVERSE: 1999 드림 커미션 | 메디슨 포켓 × 플로렌스 해링턴
◈ ◈ ◈
_커미션입니다.
◇
"로렌, 자?"
초저녁의 라플라스 직원 휴게실에는 따뜻한 적막이 맴돌았다. 며칠 내내 철야를 한 메디슨 포켓이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휴게실 탁자에 엎드려 잠든 붉은 머리칼의 익숙한 형체였다. 플로렌스 해링턴. 고약한 성미로 소문난 메디슨 포켓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다.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플로렌스에게 그가 조용히 다가갔다. 무방비하게 엎드린 플로렌스에게서는 평소보다 짙은 흙내음이 났다.
그의 예상대로, 플로렌스는 조용한 숨소리만을 내며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흙투성이인 모습을 보아하니 예의 암석 연구를 위해 출장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잠시 쉰다는 것이 지쳐 잠들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메디슨 포켓이 잠든 플로렌스의 뺨을 무심코 제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간질이던 손가락이 얼굴의 흉터를 매만졌다. 그런 메디슨 포켓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로렌스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뺨을 꼬집혀도 깨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피곤한 출장이었나 보다.
메디슨 포켓이 그런 생각을 하며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거두었다. 이럴 거면 본인 기숙사에나 갈 것이지, 굳이 휴게실에 올 필요가 있나?
그 생각과 함께 메디슨 포켓이 자신의 실험 가운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늘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주사기와 혈액 채취용 시험관이 꺼내졌다. 이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플로렌스 해링턴은 주사기를 두려워한다.
어린 아이 같은 이유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메디슨 포켓은 구태여 캐묻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였다. 단순히 어린 아이 같은 이유인지, 아니면 공포증이 있는 것인지. 진료하는 데 있어서 물어볼 법한 질문이지만, 그는 플로렌스에게 집요하게 묻지 않았다.
메디슨 포켓이 플로렌스의 왼팔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여전히 단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그가 알콜솜으로 팔을 소독했다. 꾹, 하고 그의 손가락이 채혈할 위치를 확인했다. 유려한 주삿바늘이 빛나며 플로렌스의 혈관을 찔렀다. 주사기 속에 검붉은 액체가 서서히 채워졌다. 충분히 채혈한 메디슨 포켓이 바늘을 빼고 새로운 알콜솜으로 지혈했다. 플로렌스는 여전히 깨지 않았다.
실험복에 묻은 흙내음인지, 아니면 늘 플로렌스에게서 나는 흙내음인지. 그 기분 좋은 향이 메디슨 포켓의 코를 간질였다. 메디슨 포켓이 만족스럽게 채혈의 결과물을 실험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깨어나면 주사 흔적을 보고 놀라려나. 생각에 거기까지 미친 그가 두리번거리며 필기구를 찾았다. 책장에 놓인 연필꽂이에서 볼펜을 발견한 그가 쪽지에 흔한 의사들의 필체로 경쾌하게 휘갈겼다.
건강검진 분석 겸 채혈했어. 놀라지 말라고. 분석이 끝나면 알려줄 테니까 연구실에 안 와도 돼. 들어가서 쉬어.
이만하면 됐겠지. 메디슨 포켓이 채혈한 자리에 강아지 프린팅이 된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섰다. 휴게실에는 여전히 두 사람만이 있었다. 방해꾼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한 메디슨 포켓이 펜을 제자리에 두었다.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려 왔지만 아무렴 어때. 덕분에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메디슨 포켓은 휴게실 밖으로 발걸음했다. 플로렌스의 혈액을 바로 분석할 생각에 들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
이른 저녁의 라플라스 연구소는 여전히 활기차다. 연구에 미친, 아니, 열정적인 연구원들은 늘 분주하게 실내를 돌아다녔고, 메디슨 포켓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휴게실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은 그에게 당연하게도 호재였다. 늘 주사를 거부하던 플로렌스를 채혈할 기회가 없었지만, 무방비한 상태라면 채혈 정도는 메디슨 포켓에게 있어서 식은 죽 먹기였다. 건강 검진의 목적도 있지만, 메디슨 포켓은 늘 플로렌스에게서 풍기는 흙내음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오늘이야말로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연구실 문이 덜컹 열리며 주인을 반겼다.
예의 흰 장갑을 낀 메디슨 포켓이 시험관을 꺼내들었다. 분석 자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로렌, 18세, 여성.
메모가 끝난 시험관이 혈액 분석기에 들어갔다. 메디슨 포켓이 눈을 감고 혈액 분석기가 놓인 테이블 모서리에 허리를 기댔다. 분석기가 작동하는 소리는 일정했고, 귀에 조용히 녹아들어오는 소음에 메디슨 포켓이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것을 느낀 그가 가만히 있었다. 잠시 동안은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린 그였다.
달칵, 하고 분석기가 끝나는 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두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흔들어 잠을 털어냈다.
정상, 정상, 정상.
그렇겠지. 로렌은 애초부터 건강한 티가 확실히 나는 사람이니까. 아직 젊은 나이니까 그리 크게 걱정할 부분도 사실 없는 게 보통이다.
젊은 나이라.
메디슨 포켓이 픽, 웃었다. 동갑인 친구에게 붙일 수식어는 아니다. 지극히 의료인의 시선으로 한 생각에 스스로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 플로렌스의 결과지에 금빛 눈동자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튀는 부분은 하나도 없는 건가? 그 흙내음은 어느 마도학자의 혈통에서 내려오는 인자라던가. 너 마도학자잖아. 가족···에게서 이어지는 거라던가, 그런 이야기는 없어?
물어봐야지, 바보야. 메디슨 포켓이 눈꺼풀을 박박 문질렀다. 메디슨 포켓은 가족 간의 문제에 둔감하다. 그런 것에 애착이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폭풍우'에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플로렌스에게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런 것에 무감한 메디슨 포켓이 몇 번 의도치 않게 플로렌스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한 이후로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 애초부터 상처 줄 원인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메디슨 포켓 나름의 배려였다.
각종 물질의 퍼센티지와 농도, 정상여부 등의 나열에서 메디슨 포켓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마지막 장에 있었다.
"이건 뭐야."
처음 보는 물질이 메디슨 포켓의 눈을 사로잡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지오스민의 화학 구조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인체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정도의 양은 아니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결과물을 얻은 그가 씨익 웃었다. 어쩌면 마도학자의 혈통이기에 접합 가능한 범위의 성분이었다. 그동안 의문을 품었던 흙내음의 실마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메디슨 포켓이 오른손에 펜을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잘하면 새로운 연구, 그리고 논문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상세한 분석과 실험을 위해서는 플로렌스의 혈액을 추가로 채취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러니까 보다 정확한 실험을 위해서는 채혈을 여러 번 해야한다고.
메디슨 포켓이 플로렌스를 떠올렸다.
연구를 위해서 네 혈액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협조를 부탁해도 될까. 그렇게 묻는 상상을 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메디슨 포켓에게 있어서 미지의 분야였다. 실망할까? 아니면 분노할까. 단순히 주사가 무서워서 두려워할까. 메디슨 포켓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쩌면 이미 멋대로 채혈한 점에 대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나. 물론 플로렌스가 사과를 요구한다면, 깨끗하게 사과할 의향이 있었다. 메디슨 포켓은 타고난 성정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가 플로렌스에게 무례를 수차례 저질렀지만, 플로렌스는 늘 그를 용서하곤 했다. 메디슨 포켓은 그 선을 넘나드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있어 불가해인 부분에 한해서는 무례를 저지르곤 한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돌이라도 캐다 주면 될까? 네가 잠들었을 때만 채혈하면 네가 심적으로 무리할 이유도 없지 않아? 이 연구가 유의미하게 성공하면 투자자가 당연히 더 늘 것이고, 그럼 그건 네가 너 자신을 더 알아가는 데도 도움이 될 텐데. 그럼 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돌이든 보석이든, 몇 개쯤 구해다 주는 것도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변명이다.
메디슨 포켓은 인정해야 했다. 그런 구차한 변명은 제쳐두고, 플로렌스 해링턴의 혈액은 이미 충분히 자신의 탐구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이 플로렌스와의 관계에서 어떠한 '선'을 이미 넘은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메디슨 포켓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런데 그런 걸 따지자면 우리는 그 선이라는 걸 한참 넘지 않았나? 물론 상호 합의 하의 일이었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메디슨 포켓이 코웃음쳤다.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계산하는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물어보자. 그게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다. 로렌은 그리 쩨쩨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내가 무례를 저질렀다고 하면 나는 사과할 거니까.
생각을 정리한 메디슨 포켓이 결과지와 함께 연구실 문을 나섰다. 지금쯤이면 플로렌스가 잠에서 깼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실은 발걸음이 휴게실을 향했다.
◇
"로렌!"
휴게실 문을 벌컥 연 메디슨 포켓이 플로렌스의 이름부터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플로렌스는 사라져 있었고, 메디슨 포켓에게 말을 건 것은 밀단발의 소년이었다.
"메디슨 포켓?"
"뭐야, 에즈라? 여긴 무슨 일이야?"
"본부에 출장 올 일이 있었어요."
"그래. 그럼 로렌 못 봤어?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저도 방금 왔는데, 휴게실은 계속 비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쯧."
메디슨 포켓이 무심코 혀를 찼다. 그 짧은 사이에 엇갈렸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금방 깰 줄 알았으면 진작에 깨워서 돌려보냈을 텐데. 하지만 탁자에 놓았던 쪽지도 함께 사라졌다는 건 플로렌스가 메디슨 포켓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았어, 에즈라. 고마워."
"천만에요. 들어가세요, 메디슨 포켓."
"너도."
메디슨 포켓이 휴게실을 성큼성큼 나섰다. 플로렌스가 제 말대로 행했다면, 그는 기숙사에 있을 터였다. 사원증을 찍고 나온 메디슨 포켓은 직원 기숙사 건물을 향했다. 플로렌스의 방에 가까이 갈수록 흙 묻은 발자국이 바닥에 드문드문 찍혀있었다.
플로렌스의 방 앞에 도착한 메디슨 포켓이 문을 두드렸다.
"나와."
30초 후에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메디슨 포켓이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직원 몇이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메디슨 포켓임을 확인하고 도로 발을 채비했다.
1분 쯤 뒤, 문이 열렸다. 비몽사몽한 상태의 플로렌스가 문틈으로 메디슨 포켓을 마주했다.
"···메디슨?"
"아, 역시 자고 있었네. 들어가도 되지?"
"응?"
"'응'이라고 했지?"
메디슨 포켓이 막무가내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방비하게 열린 문 뒤로 새하얀 네글리제 차림의 플로렌스가 드러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플로렌스가 멈칫했다. 메디슨 포켓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슨 일이야, 메디슨 포켓?"
"쪽지 봤지?"
"응."
"검사지를 들고 왔어."
"검사지?"
"그래. 혈액 분석 검사지. 내가 건강 검진 겸으로 채혈했다고 했잖아. 잠 덜 깼어?"
플로렌스가 문을 닫고 들어와 다소 멍한 상태로 메디슨 포켓이 내민 검사지를 받아들었다. 메디슨 포켓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댔다. 그 짧은 시간만에 씻고 잠든 플로렌스가 대단하다 해야할지, 와중에 평소라면 볼 일 없는 네글리제 차림의 그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야."
"왜 그래, 메디슨?"
"너 그런 옷 싫어하지 않던가?"
"출장을 오래 다녀와서 입을 만한 게 몇 없었어."
"나는."
네가 그냥 알몸으로 있어도 딱히 상관없는데. 메디슨 포켓은 무심코 튀어나오려던 그 말을 씹어삼켰다. 아무리 몇 번 관계를 했다고 해도 그런 말은 무례하다는 것을 메디슨 포켓 역시 알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플로렌스는 그런 메디슨 포켓을 의식하기나 하는 건지, 검사지를 천천히 읽어내리고 있었다. 플로렌스가 눈을 몇 번 꿈뻑이더니 입을 열었다.
"뭔가 특이사항이 있는 거야? 전부 '정상'인 것 같은데."
"하. 마지막 페이지를 봐. 내가 네게서 나는 그 흙냄새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플로렌스가 그 말을 듣고 검사지를 맨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마지막 줄에 적힌 화학식을 보고 그가 갸웃한다. 메디슨 포켓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오스민이라고 들어봤어?"
"흙냄새···그러니까 보통 비가 올 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이루는 거라고 알고 있어."
"좋아. 이야기가 빠르겠네. 인체에 무해한 건 아니야. 하지만 네 피에서 그게 미량 검출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발견이지."
"······."
"이건 대단한 발견이라고! 어쩌면 새로운 연구 주제, 그리고 논문을 낼 수도 있을지도 몰라. 마도학자의 혈통으로 인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연구할 수도 있겠고."
"그렇구나."
"···시큰둥한 반응인데. 좀 더 네 일처럼 기뻐할까 싶었거든."
"하하, 그래?"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 연구를 한다고 하면 네 혈액 샘플이 더 필요할 거야."
"그 말 할 것 같았어."
"네가 잠들었을 때 허락도 없이 채혈한 건···미안하게 생각해."
예상보다 가라앉은 플로렌스의 반응에 메디슨 포켓이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골라내며 짜집기했다. 역시 멋대로 채혈한 게 문제인 건가? 메디슨 포켓의 뇌로는 그 이유를 명확히 계산할 수가 없었다. 네가 불편해하지 않을 방법이 이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답인가? 그 생각과 함께 메디슨 포켓이 제 뒤통수를 벅벅 긁어댔다.
"로렌."
"응."
"문제가 있다면 말을 해. 내가 잘못했다면 잘못했다고 이야기하고. 너도 알잖아? 나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서는 멍청할 정도로 둔감하다는 거."
"그렇지."
"내가 인내심이 짧다는 것도 알고 있고."
"···미안, 정말로 피곤해서 그래. 네가 몰래 채혈한 건···솔직히 언젠간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놀라진 않았어. 봐봐."
플로렌스가 왼팔을 쑥 내밀었다. 메디슨 포켓이 붙여둔 강아지 반창고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메디슨 포켓이 눈썹을 까딱였다.
"뭐를 보라는 거야? 잘 붙어있네."
"그래, 굳이 안 뗐어. 귀엽잖아."
"참 나, 그래서 뭐. 마음에 들었다고? 괜찮다고?"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 내가 자는 동안 못 본 거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잖아?"
"맞는 말이지. 네가 괜찮다고 하면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야. 알지? 그러니까 거절할 거면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
"거절이 아니야. 정말로 내가 잘 때라면 상관 없어, 메디슨 포켓. 그게 네 흥미를 이끌었다면 내가 막을 이유도 없지."
"나는 네게 강요할 생각이 없어."
"그냥 이번처럼 강아지 반창고만 잘 붙여주면 될 것 같아."
"그게 다야? 무슨 보석이나 희귀한 돌이 필요하다던가, 연구에 진척이 있어서 투자자가 모이면 그 정도는 구해다 줄 수 있어."
"하하, 그렇겠지. 나는 그 마음이면 충분해, 메디슨. 정말이야.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이야?"
"···그건 아니지. 그럼 동의한 거다?"
"그래. 그치만 그것과 별개로 내 잠을 방해한 대가는 받아가야 할 것 같아."
"뭐?"
플로렌스가 옷장에 다가가 무언가 열심히 뒤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아지 패턴이 잔뜩 있는 로브가 플로렌스의 손에 들렸다.
"뭔데?"
"씻고 입어. 같이 자자."
"뭐?"
"빨리, 메디슨 포켓."
황당해하는 메디슨 포켓의 손에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로브가 쥐어졌다. 플로렌스는 그대로 메디슨 포켓을 샤워실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메디슨 포켓의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여기서 씻으라고?"
"착하지, 메디슨 포켓. 트리트먼트랑 린스도 있으니까 다 쓰고 나와. 계속 그러다간 수습 불가인 개털머리가 될 걸?"
"무슨 상관이야?!"
"투자자들에게 예쁘게 보여야지. 안 그래?"
"······."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는 플로렌스의 말에 얌전히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실에서 멀어진 플로렌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누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금 출장 다녀온 사람을 깨워서 연구 이야기부터 하다니. 메디슨 포켓도 못 말린다니까. 플로렌스가 쿡쿡 웃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와 두꺼운 이불 속의 온도차이가 잠들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조용히 들려오는 샤워 소리는 플로렌스를 다시 수마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20분 정도 지난 후 샤워실에서 나온 메디슨 포켓은 수건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털며 방 안을 거닐었다. 플로렌스가 준 강아지 프린팅의 가운은 메디슨 포켓에게 꼭 맞았다. 두 사람의 키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남을 것을 예상한 메디슨 포켓은 의아했다. 잘못 사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운이 주인을 잘 찾은 셈이다.
플로렌스가 잠든 방 안에는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숨소리와 정적만이 가득했다. 메디슨 포켓이 입을 삐죽 내밀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새를 못 기다리고 잠든 플로렌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뺨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이미 깊은 잠에 빠진 플로렌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메디슨 포켓이 나지막히 플로렌스의 이름을 불렀다.
"로렌."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메디슨 포켓 역시 따뜻한 물을 맞다 보니 피로가 뒤통수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한 그가 물에 빠진 강아지들이 물을 털어내듯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마저 휘리릭 털어냈다. 플로렌스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약간 괘씸하다는 마음이 든 그가 플로렌스의 이마를 쿡 찔렀다. 이미 한 번 깨우는 무례를 저질렀으니 그 이상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메디슨 포켓은 손을 거두고 플로렌스 옆의 공간에 꼼질거리며 침대 위에 올라갔다. 이불 속은 플로렌스의 체온 덕에 따뜻했다.
그래, 어차피 퇴근하고 늘어지게 잘 생각이었으니까. 곁에 사람이 있으면···화학적으로도 확실히 도움이 된다. 굳이 성관계를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전략적인 선택이다. 딱히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차피 둘 다 피로했으니까 잘 된 일이지. 로렌은 무슨 생각으로 제안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손해는 아니니까. 그런 건 자고 일어나서 따져도 되는 일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메디슨 포켓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잘 자, 로렌.
◇
새벽 3시즈음 눈을 뜬 플로렌스가 순간 흠칫했다.
맞다, 메디슨 포켓이 옆에 있었지. 곁에서 자신과 같은 프리지아 향이 은은하게 넘어오는 것을 보니 정말로 헤어 케어를 다 하고 나왔나 보구나. 착하네.
그 생각과 함께 플로렌스가 얌전히 잠든 메디슨 포켓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렇게 흩트러진 머리카락을 보아하니 제대로 드라이를 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플로렌스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렸다. 자고 일어나면 제대로 드라이하라고 잔소리라도 할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플로렌스는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사이 메디슨 포켓이 무어라 잠꼬대를 하며 플로렌스를 향해 몸을 돌려누웠다. 플로렌스가 그의 입에 들어가 있는 이불의 일부를 잡아서 뺐다. 남의 이불까지 이렇게 물어뜯는 고약한 잠버릇을 가진 사람은 주변에 메디슨 포켓 밖에 없을 거다. 메디슨 포켓의 입에 들어갔던 부분은 잇자국이 선명하다 못해, 찢어질 듯이 너덜너덜했다. 플로렌스가 메디슨 포켓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이게 뭐야, 메디슨 포켓. 기껏 귀여운 가운을 빌려줬더니 남의 이불을 뜯어먹기나 하고! 수면용 마우스피스라도 선물해 주는 게 좋을까? 메디슨 포켓은 그런 걸 살 돈으로 개껌이나 사달라고 할 사람이긴 하지만.
이게 무슨 고민이람. 플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잘 자, 메디슨 포켓. 좋은 꿈 꿔."
◇
창문을 비집고 선명하게 들어온 햇빛은 깊게 잠든 두 사람을 방해하지 못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메디슨 포켓의 두 눈이 꼼질대며 떠졌다. 늘 그랬듯이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가 쉽게 저지당했다. 플로렌스가 다시 잠들 때 메디슨 포켓을 꼭 안고 잠든 탓이었다. 메디슨 포켓이 버둥댔지만, 플로렌스가 손을 쉬이 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로렌, 이거 놔. 안 일어날 거야?"
"······."
"야!"
"조금만 더 잘래···."
"이거 놓고 말해, 이 바보야!"
"···싫어···."
"아오, 진짜."
결국 플로렌스의 품에서 탈출하는 데 실패한 메디슨 포켓이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오늘은 주말이었고, 서늘한 바깥 공기와 대비되는 따뜻한 이불 속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플로렌스가 무어라 웅얼대더니 다시 미약한 숨소리만을 내기 시작했다. 메디슨 포켓은 그대로 플로렌스의 품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방과 별 다를 바 없는 백색의 천장. 같은 침대, 그리고 같은 침구. 다른 점이라면 옆에 플로렌스가 있고, 그리고 침구들은 잇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다는 점이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메디슨 포켓의 시선이 자신이 이불에 남긴 잇자국을 향했다.
"어."
메디슨 포켓이 얼마 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팔을 빼내 콧등을 긁었다. 이 정도 잇자국은 그래도 괜찮지 않나? 찢어버린 것도 아닌데. 플로렌스가 원한다면 라플라스에서 교환해주긴 할 거다. 평소의 잠버릇이 튀어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픽 웃었다.
다음에는 마우스피스라도 들고 올까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