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Insight
Arcaea 커미션 | 혜안 × 고독
◈ ◈ ◈
_커미션입니다.
◇
레폰은 죽어가고 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념은 죽었지만, 그건 레폰의 죽음을 아주 조금 늦출 뿐이었다.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신의 요람은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그 세계를 저버릴 수 없어, 반려를 뒤로 한 피조물의 푸른 두 눈이 세계를 담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았고, 다른 동류인 조형자들이 있음에도 그녀는 무척이나 고독했다.
레폰의 척추에서 벗어난 넬은 삶을 영위해 나갔다. 의연하고, 고독하게. 그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곁에 엘이 없다는 점을 제한다면 말이다.
"엘, 저기—"
무의식적으로 엘의 이름을 부르기를 세 번.
맞다, 엘은 더 이상 이 곳에 없지. 아니, 라크리미라는 더 이상 레폰에 존재하지 않는다. 레폰에게 힘을 물려받은 추적자의 힘만으로는 레폰을 지킬 수 없었다. 레폰의 죽음과 종말은 예정되어 있었고, 그것은 레폰의 유산인 혜안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넬은 자신의 선택이 무모함을 알고 있다. 분명 엘, 그러니까 라크리미라를 따라간다면 이 세계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겠지. 어쩌면 그야말로 '신' 그 자체가 된 라크리미라가 자신 역시 신으로 만들지도 몰랐을 일이고.
하지만 넬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스스로가 가장 소중한 라크리미라와 달리, 넬에게는 이 세계가 아주 미세하게 더 소중했기에. 넬은 그래서 평소와 같은 삶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평소와 같이 의뢰에 따라 일을 마친 넬이 지친 상태로 숙소에 들어섰다. 반기거나 함께 돌아올 이 없는 방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각오한 일이었다.
분명 그럴 터였다.
◇
"넬, 이 빵은 뭐야?"
엘이 숙소 주방의 탁자에 놓인 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 빵이 정말 무엇인지 묻는 것이 아닌, 몇 초 후에 엘의 입에 들어갈 것이라는 선언에 가까웠다. 넬이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그 빵은 엘의 손에 들어갔다. 넬이 빵을 우물대는 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빵이 순식간에 사라진 후에야 엘의 머리에 꿀밤이 날아들었다.
"아! 뭐야?!"
"엘, 그건 저녁의 샌드위치를 위해서 산 거였어."
"말을 했어야지!"
"네가 그럴 새도 없이 먹었잖아."
"흥. 그건 조심성 없게 테이블에 빵을 올려둔 네 탓이야, 넬."
"하여간 너는 매사가 제멋대로지, 엘."
"전에 받은 보수로 또 사면 되잖아? 모처럼 넉넉하게 받았잖아."
"······."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엘을 한 번씩 다그쳐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넬이 한숨을 쉬며 나갈 채비를 했다. 엘이 종종걸음으로 넬을 뒤따랐다.
늦은 오후에 재방문한 빵집에는 통밀빵이 남아 있었다. 엘이 먹어버린 새하얗고 부드러웠던 빵과는 대조되지만, 나름대로 샌드위치를 만들기에는 적합했다.
숙소로 돌아와 금세 만들어진 샌드위치에는 달걀 프라이, 햄, 토마토가 들어갔다. 엘이 통밀빵에 대해 투정을 부렸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뿐이었다. 넬이 탁자 아래에서 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엘은 결국 툴툴대며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괜찮네."
"그래서 싫다고?"
"뭐라고?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넬, 귀 청소 좀 해야겠는데?"
엘이 시치미를 뚝 떼며 제 입가에 묻은 소스를 깔끔하게 핥아먹더니 혀를 삐죽, 내밀었다.
넬이 고개를 저으며 의미 없는 회상을 흩트렸다. 제 앞에 놓인 샌드위치는 그 때 엘이 먹어버린 것과 같은 빵으로 만든 것이었다. 분명 그 때와 다를 바 없을 텐데도, 샌드위치는 기이하게도 맛이 없었다. 같은 장소, 같은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 분명 안에 넣은 것들 역시 같았는데, 어째서일까.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씹어 삼킨 넬은 그대로 접시를 치웠다.
늦은 시간이 되자, 침대에 누운 넬은 제 옆의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다면 엘이 옆으로 누운 채로 잠들 때까지 넬을 향해 종알거렸을 터였다. 넬은 옆으로 누워 그 침대로 바라보며, 영원히 닿지 않을 질문을 내뱉었다.
"라크리미라, 행복해?"
돌아오는 답은 당연히 없었다. 더 이상 곁에 없는 제자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넬은 알 방도가 없었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엘.
어차피 영영 떠나버린 네가, 레폰이 아닌 어디선가 적어도 행복하기를.
그것은 넬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위해 빌 수 있는 최선의 소원이었다.

